일흔아홉의 고백

아버지. 30×25. 2019.

카톡! 카톡! 울려대는 문자에 잠이 깨였다. 오늘도 여전히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기를 가족 카톡방에 남기시나 보다. “아빠는 출근했다. 3청(우리 삼남매가 잘 살아내는 게  고맙다고 청이라고 부르신다)은 주무시나?” “딸들 아들아 아빠 출생부터 살아온 과정 생각이 나서 아직 잠이 오지 않아. 가명으로 책을 쓸까. 십여살 쯤에 오슬 씨서 가라 입은 기억이 업구나 두더지인생 아니 개천인 애비. 용 삼총사 고마워” “훌륭한 부 가못되 미안.” .......

41년 신사년생. 올해 일흔아홉의 아버지는 학교교육만 제대로 받으셨더라면 지금쯤 어느 분야에서건 일가견을 이루셨을 분이시라는 직감이 들었다. 남의집살이 전전하시면서도 몰래 야학을 다니시고 한자 책 주머니에 넣어 나무 하러 산을 다니셨던 그 시절, 시골교회에서 성탄절 추수감사절 플랭카드를 직접 서예체로 쓰는 것은 내 아버지의 몫이었다. 교회청년부 시절, 예배 후 총계를 낼 때 수학적인 계산이 안 되시니 눈치껏 신도 수를 헤아려 점수를 매기셨다고 웃으시며 그 때를 회상하신다. 감각적 스토리텔링의 선각자라 나는 놀려 댔다.

아버지는 1986년 당시 독일형 삼익피아노라고 텔레비전에서 선전하던 120만원이나 하는 피아노를 집에 들여 놓으셨다. 딸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후에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악보조차 볼 줄 모르시는 아버지는 청음이 좋으신 분이셨다. 곡을 들으시면 두 손으로 그 곡을 쳐 내신다. 특히 찬송가는 아주 수준급이시다.

못 배운 것이 평생에 한이 되셨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이일 저일 직장을 참 많이도 바꾸셨던 기억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현실과 재능적 감각의 불일치로 얼마나 그 심장이 힘이 드셨을까. 아버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장을 잃고 우리 삼남매와 아내가 단칸방에서 배를 굶고 있는 악몽에 잠을 깨시고는 우신다 하셨다. 꿈이라 다행이라고....... 현실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요즘도 가족카톡방의 방장은 일흔아홉의 아버지시다. 아내와의 일상을 사진으로 남기고 동영상을 찍어 카톡방에 올리신다. 재치와 센스는 우리 삼남매보다 일흔아홉의 아버지가 압권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오늘 전화를 넣었다.

“아버지, 컴퓨터에 글 쓸 블로그 하나 만들어 드릴테니 거기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기억 더듬어 적어 보시지요. 이 딸이 글자 수정도 해 드리고 아버지 일대기 하나 남길 수 있게 도와 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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