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포스터.

‘미쓰백’이라 불리는 여자가 있다. 욕설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살며 눈빛은 거칠다. 두려울 만큼 날카로운 이 눈빛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상처가 깊은 사람이 웅크리고 있다. 이런 여자의 앞에 학대에 시달리는 아이가 나타났다. 불행의 강도가 커질수록 상처는 독한 아가리를 더 크게 벌리는 법이라, 온정이 필요한 아이에게 아무도 손길을 건네지 않는다. 이미 가혹한 현실에 상처를 입은 미쓰백은 아이를 위해서 세상과 맞서기로 했다. 그렇게 “금이빨 빼고 다 씹어 먹어주마.”를 외치던 <아저씨>가 되었다.

신문기사로 접하기에도 부담스러운 게 ‘아동학대’다. 마음 편하게 영화 한 편 관람하려는 사람에게는 힘겨울 수밖에 없는 주제다. 따라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욕먹기 꼭 좋다. 그런 의미에서 <미쓰백>은 걸음이 단단하다. 시종일관 한눈팔지 않고 묵직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그래서 마음이 움직이고, 때로는 몹시 아프게 요동치기도 한다. 

여성이 주인공이면 모성애는 필수라고 누가 공식으로 정한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이런 의미에서 <미쓰백>은 성인여자의 본능적인 모성에 기대는 흔하디흔한 서사가 아니어서 좋다. 상처 입은 여성 두 명이 서로를 응시하며 위로한다는, 연대의 방식으로 치유한다는 설정이 또 좋다. 얼핏 <아저씨>의 여성판 같은 느낌도 있지만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은 애써 피해간다.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은 멋지다. 상업영화임에도 흥행이 될 만한 미장센이나 액션에 기대지 않고 묵묵하고 담담하게 흐름을 이끌어가는 뚝심에는 찬사를 보낸다. 

아무튼, 지구상의 모든 ‘미쓰백’과 ‘지은’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아니 행복하지 않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워서 아프다. <미쓰백>이 덤덤하게 보여주는 영화적 방식 덕분에 역설적으로 주제는 선명하게 부각이 된다. ‘아동폭력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고, 없어질 때까지 누군가는 계속 자기만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말이다. 주위에 상처받은 아이가 있다면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어른이 있다면 공감하고 연대하고 고발하자.  

배우가 자신을 대표한 작품을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축복일 텐데, ‘한지민’은 지금까지 예쁘다 또는 성격 좋다는 소리만 듣다가 인생작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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