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墨). 40×30. 2018.

“이 여자는 옆구리에 붓 가방 들고 다니면서, 평생 한량처럼 놀고먹겠구나.”

시집 온지 채 일 년이 안 된 예수쟁이 며느리의 사주를 몰래 보러 가신 시어머니는, 옆에 붓이 보인다는 말에 당신은 점쟁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점 본 것을 비밀로 하라며 아들에게 당부하시곤 굶어 죽지는 않겠다고 하셨다 한다. 그로부터 20여년 지나가는 세월, 그 점쟁이의 신기를 믿어야 하나. 어느 날부터 당신의 그 며느리는 붓 가방 챙기는 일들이 잦아졌다.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그 옆을 더 지나쳐 버리는 안동 가는 길은 무척 낯설기만 하다. 차 뒷좌석에 글씨 쓸 문방사우 한가득 싣고 달리면서 문득문득 드는 생각들이, 좋은 길벗 하나 있어 그늘 좋은 정자에 쉬며 붓질 한바탕 놀다 가고 싶어진다. 악기 하나 다룰 줄 아는 길벗이면 좋겠고, 노래를 잘 부르는 길벗도 좋겠다. 문학을 좋아하는 길벗이라도 좋겠다. 욕심을 부린다면 나와 같이 붓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길벗이면 더 좋겠다. 

길 위에서 감정이 북받치면 미리 갈아 온 먹물을 붓에 적셔 하얀 화선지 풀밭에 깔고 돌멩이 주워 종이에 누르고는 붓 가는대로 길벗과 함께 한바탕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은 온통 초록이 짙었고, 굽은 시골길을 지나고 있는 21세기 젊은 여자는 나그네의 심정으로 오래된 시간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안동을 들어서서 군자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노인보호구역’이라는 바닥글씨를 보고 이곳이 안동임을 다시 느껴 본다. 입구에 들어서니 고택 기와 선과 짙은 세월의 색이 글씨와 참 잘 어울리는 곳이구나 싶다. 구석구석 붓과 어울리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오래된 대청마루에서 한바탕 글씨를 쓰려고 자릴 깔고 있으니 이곳에서 만난 어느 한 뼈대 있는 중년이 나에게 물으신다.

“서예를 한다고요? 몇 년 썼어요?” “저? 이골 나게는 썼습니다.”

글씨 쓰는 내내 그 중년은 힐긋힐긋 지켜보며 아무런 말이 없으시다. 

붓 한 자루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열 마디의 대화보다 더 끈적거렸다. 붓 맛을 본 사람들은 표정이 바뀌고 경계심이 풀어진다. 이것이 붓 한 자루의 힘이었다.  

“어무이, 이 며느리 붓 한 자루 들고서 인자는 글씨 버스킹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또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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