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의 영화이야기

영화 포스터

모든 것이 시스템화 되면서 개천에서는 더 이상 용이 나지 않는다. 탈출구 없이 경직된 사회의 청춘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한다. 이렇게나 암담하게 만든 건 기성세대의 잘못이 크다. 그래도 살아간다. 이제 청춘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이창동 감독이 돌아왔다. <초록물고기>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는 ‘거장’으로 가는 계단처럼 단단했고 각각의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또한 분명했다. 그런데 8년만의 신작 <버닝>은 이창동스럽지만 이창동스럽지 않은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이분법적인 분류일 수 있으나 ‘이야기’로 말하는 감독과 ‘이미지’로 말하는 두 부류의 감독이 있다고 할 때 이창동은 이야기로 말하는 감독이었다. 분명한 서사와 그 서사의 구조 안에서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인물들은 자유자재로 이창동의 이야기를 풀었다. 관객들이 받는 느낌도 분명해서 감독과의 교감 또한 수월한 편이었다. 흔히 홍상수류의 사변적인 영화에 소통의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들도 이창동의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영화지만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했다.

이런 점에서 <버닝>은 상당히 불편하다. 하지만 지극히 이창동스러운 영화다. 이 극단의 양가감정이 하나의 영화를 본 후 정리되지 않은 채 가슴에 오래 남는다. 미스터리의 외피를 둘렀지만 미스터리만으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외피를 벗기고 이창동이 깔아놓은 상징과 은유로만 해석하는 것 또한 삐걱거린다. 그럼에도 이해를 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 영화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아, 이것이 감독의 의도였나?’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하게 하고 각자의 느낌을 찾아가는 것이 그가 배우 유아인과 나누었다는 확장인가?’ 이렇듯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파편화되어 떠돌면서도 오랜만에 ‘예술’과 충돌하는 느낌이 매너리즘에 빠지기 직전인 영화적 감성을 다시 깨운다.
 
단순히 영화적 내러티브만으로 볼 때는 불안한 청춘에게 건네는 거장의 불편한 은유일 수 있으나 결국 이창동 감독이 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데뷔작부터 천착한 이 시대와 사람들에 대한 작가적 성찰이다. 그 방식이 소설이 되었건 영화가 되었건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과 방향을 정확히 안다. 흔히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들 중에는 때로 노회함이 본질을 가려 미궁에 빠지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 이창동은 여전히 단단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다만 불편함은 관객의 몫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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